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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게 된다면, 첫 번째 글은 의심 없이 ‘노팅힐’ 이었다. 

23살,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같이한 영화이기도 하다. 30번을 넘게 봤다. 이유라고 하면, 극중 애나 스콧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일까. 군대에서 프로그램 선택권이 없던 시절에 서점에서 산, 대사만 나오는 DVD를 들었다. TV를 마음대로 볼 수 있었을 땐 주 1회는 꼭 챙겼으니 이 얼마나 지독한가. 사실 오늘도 봤다. 이제는 대사만 들어도 장면이 떠오르고, 다음 대사가 무엇인지도 읊는다. 당연하지만 스포성 글이니 보지 않으신 분들도 보시기 바란다. 단순히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장면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및 취향이 들어가 있으니 열려있는 마음으로 읽길 바란다. 좋아하는 장면, 장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순간을 얘기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노력해보겠다.


세계적인 스타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은 런던에 한 허름한 여행서적 전문 서점에 가게 된다. 한순간에 서점의 분위기는 바뀌고, 새커의 시선은 천천히 그녀가 만지는 책 하나하나에 옮겨 간다. 아는척하지 않으려 하는 새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행복도 잠시, 한 손님의 방해, 사인까지 요청하는 손님 여기에 안 나는 “Dear Rufus, you belong in jail” 이라는 터프한 사인을 남겨준다. 첫 번째 만남은 이렇다 할 게 없다. 그저 우리의 삶에도 있을법한 이야기. 유명인이 동네 서점에 방문한 이야기.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바꾸는 건 두 번째 만남이다.  

오렌지 주스를 들고 코너를 돌아 나오는 새커, 애나의 옷에 주스를 쏟는다. 약 15m. 집까지의 거리. 절인 자몽. 안나의 키스. 비현실적이지만 행복했던 기억. 아직도 이 장면을 보면 애나의 키스는 설명하기 어렵다. 단순히, 여러 가지의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을까. 키스하기 전 새커를 바라보는 짧은 순간의 애나의 눈빛은 애틋함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새커는 우여곡절 끝에 안나와 연락이 닿고, 데이트를 하게 된다. 동생의 생일파티에 같이 참석한다. 제일 좋아하는 장면 3개 중 1개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화려한, 세계적인 스타 애나가 아닌, 새커의 여자로서 자리를 지키며 평범한 일상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친구들끼리 실없는 얘기하며 웃고, 생일을 축하하며 그저 그런 선물을 주고받는 그런 일상. 이때의 애나의 시선에 따라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화면이 전환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애나의 눈빛은 그저 한없이 소녀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아프다. 말없이 바라보며, 가질 수 없는 평범한 일상을 부러워하듯 보니 말이다.

늦은 시간. 사유지 정원. 의자. 

‘For Jone who loved this garden - From Joseph who always sat beside her.’ 

애나는 이 문구가 새겨진 의자에 앉아, 같이 앉자고 나긋하게 얘기한다. 누군가는 평생 이렇게 함께한다고 얘기하면서. 극 중 애나는 이러한 사랑을 원했다. 남자가 때리는 사랑 말고, 바람피우는 사랑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우리가 늘 평범하게 하고, 때론 하찮게 생각하는 그런 사랑을 갈구한다. 그녀가 바란 건 대단한 사랑이 아니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작은 기회가 필요했다.

행복도 잠시. 새커는 본인만 모르는. 미션임파서블의 국장. 애나의 남자친구가 미국에서 날아온다. 시련의 아픔, 새커는 스파이크에게 억지스레 연애상담을 하고, 여자를 소개받고, 잊어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애나의 포르노 사진이 퍼지게 되고, 갈 곳 없던 그녀는, 행복한 기억만 있던 새커에게 간다. 새커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슬퍼하는 그녀를 집에 들이게 되고, 또 한 번의 인연이 시작된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누군가 가장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생각해 보자. 황홀하다. 이때부터 애나는 정말 여린 소녀가 된다. 제일 좋아하는 20분이다.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는 애나와는 달리 새커는 '보고싶었다'는 말에 움찔하지만, 또 한 번의 상처가 두려워 조금은 신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온 마음 다해 애나의 기분을 생각한다. 대사 외우는 것을 도와주고, 그녀의 일을 궁금해하고, 얘기를 들어준다.

‘Big feet, Large shoes’ 

내가 미쳐하는 장면이다. 애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면. 늦은 밤 신문을 읽는 새커의 발을 보고, 발이 크다 하는 그녀. 발이 큰 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물어보는 그녀. 새커는 아는 듯한 눈치에도 모르는 척을 한다. 성적인 농담이지만, 이에 그녀는 큰 발은 큰 신발을 의미한다는 장난스러운 말을 하고, 정말 아름답고, 소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새커를 바라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녀의 가장 아름답고, 평범하고, 본인이 꿈꿔 왔던 일상의 모습이다. 꾸밈없다. 배우로서의 애나와 그저 한 남자를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의 모습이 정확하게 나뉘는 시점이다. 


꿈만 같던 하루의 끝. 그들이 마주하는 건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 또 한 번의 이별. 사계절이 바뀌고, 다시 지금.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한 새커는 애나가 영국에서 촬영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를 보러 촬영장에 방문하지만, 그곳에서의 가슴 아픈 애나의 말. 


모든 것이 시작된 런던의 한 서점. 새커는 다시는 상처받기 싫다는 말을 하고. “I’m also just a girl standing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 이 말과 함께 애나는 떠나간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본인이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새커,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하는 마지막 10분 그리고 ‘indefinately’.

유명한 여 배우, 화려한 의상의 애나. 한 작은 서점의 주인, 시종일관 풀어헤친 셔츠와 트라우저의 새커. 

둘의 만남은 당연하리 만큼 순탄치 않았다. '우연'이 만들어준 행복한 시간들이었지만, 우연 속에 '필연'같은 상처들은 피할 수 없었다. 노팅힐 속 애나는 사랑 앞에 미성숙한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새커는 그런 모습을 사랑했다.

 

우리는 싫든 좋든 사랑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로맨틱 & 코미디 장르의 '노팅힐'은 절절한 사랑 이야기도, 유명인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다툼은 중요치 않다. 사랑을 얘기하고, 허락할 수 있는 작은 기회, 용기를 얘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글에서 입이 닿도록 얘기하는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누가 먼저 얘기하고, 많이 하는 게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는 오늘도 그녀,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고, 얘기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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